광고

씨알사상 지상중계● 함석헌의 생명학적 진리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3/11/25 [17:01]
생명은 ‘살라’는 하늘의 명령···참답게 살아야

씨알사상 지상중계● 함석헌의 생명학적 진리

생명은 ‘살라’는 하늘의 명령···참답게 살아야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3/11/25 [17:01]

우리말에서 읽어내는 삶의 진리
 

▲ 이기상 교수     ©

함석헌의 일생의 화두는 생명, 평화, 진리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의 독특한 사상적 면모는 ‘생명학적 진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생명학적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벌써 예사의 진리가 아님을 함축하고 있다. 철학에서는 진리하면 으레 인식론적 진리를 떠올린다. 낱말, 개념, 명제가 실제의 사물이나 사태와 일치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참과 거짓이 판단된다. 진리는 이러한 인식 또는 앎과 연관되어 가리새 구실을 하는 참가리인 셈이다. 생명학적 진리에는 인식이나 앎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주장이 강조되고 있다.
 
함석헌은 ‘생명’을 한마디로 ‘살라는 하늘의 뜻’으로 풀이한다. 생명체는 그러한 하늘의 뜻을 받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개체들이다(생명학적 차이). 따라서 우주에서의 생명체의 등장은 우주 역사를 본래의 역사인 생명의 역사로 전환시키는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개개의 생명체들은 다 살라는 하늘의 뜻을 받아 자신의 개체 생명을 불살라(에너지로 태워) 우주 곧, 생명의 역사를 돌리는 데 동참한다. 생명체는 자기 안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읽고 그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생명체가 추구하고 이행해야 하는 진리이다. 진리를 이런 의미로 알아들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인식론적 진리가 아니고 생명학적 진리이다.
 
함석헌은 바로 우리말에서 우리 겨레의 삶의 진리를 읽어내려고 노력하였다. 그 말은 양반과 지식인들이 백성들을 속여서 지도자로 군림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빌려온 어려운 외국어(한문, 일본어, 영어)가 아니라 이 땅의 씨들이 반만 년의 역사와 전통 속에 매일같이 사용해온 우리말이다. 함석헌은 우리 삶에서 우리의 말과 글, 우리의 글월(문화)이 돋아나온다고 하며 우리말로 할 수 없는 종교, 철학, 예술, 학문이 있다면 아무리 훌륭해도 그만두라고 외친다.
 
함석헌의 ‘참’(진리)에 대한 풀이를 생명학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정당한 근거는 그의 사상 핵심이 ‘생명’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우주 자체가 스스로 발전하자는 하나의 뜻을 가지는 생명체이다. 그것을 과학적으로 보면 생명의 진화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늘나라 또는 정토의 완성이다. 함석헌은 우주 전개 역사를 생명의 진화 과정으로 볼 정도이다.
 
“역사는 영원의 층계를 올라가는 운동이다. 영원의 미완성곡이다. 하나님도 죽은 완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원의 미완성이라 하는 것이 참에 가깝다.…역사는…그저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다…산 것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자람이다. 생명은 진화한다.”
 
함석헌은 <진리에의 향수>라는 글에서 ‘삶의 진리, 진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펼친다. 그가 즐겨 읊은 유영모의 시 <참>을 읽어보자. 여기에는 참(진리)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배어 있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잘 참가
참 참이 참아 깨 새
하늘 끝 참 밝힐 거니
참 든 맘 빈 한 아 참
사뭇 찬 참 찾으리.
 
함석헌, 우리말에서 진리찾으려 애써
‘참’ 한글자 속에 생명·진리 녹아있어

 
함석헌의 진리에 대한 독특한 생각, 다시 말해 삶과 진리의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을 드러내는 ‘생명학적 진리관’은 “삶이 참”이라는 그의 말에서 잘 나타난다. 우주가 곧 자라나는 생명이라면 우주의 진리는 당연히 생명의 진리일 수밖에 없다. 우주의 전개와 더불어 우주생명의 날줄에 맞추어 개체생명들이 자신들의 씨줄을 엮어 우주의 역사를 짜나가는 것이 낱생명들의 구체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참(진리)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무슨 근거로 삶을 참이라고 주장하는가? 함석헌은 삶 뒤에는 언제나 절대의 명령이 서 있다고 말한다. 우리 일상어 ‘생명(生命)’에는 ‘생(生)은 명(命)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삶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살아 있다’가 아니라 ‘너는 살아라’하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생(生)은 선택을 불허한다.” 살 수 있으면 살고 살 수 없으면 말자는 그런 삶이 아니다. 생명은 ‘살라’는 하늘의 절대 명령이다. 삶은 그 명령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사르는 것이다. 삶은 필연이고 절대다. 따라서 하늘의 명령에 따라 사는 온갖 형태의 삶이 다 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생명체들의 삶의 현상들과 행태들이 곧 참인가? 함석헌은 그것이 참의 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참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삶이 참인 것은 삶이 참을 찾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단순히 하늘의 명령에 따라 존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하늘의 뜻을 찾아서 그 뜻에 맞추어 살아가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짊어진 특출한 존재다. 인간은 ‘스스로 해나가는’ 우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스스로 참을 찾아 그에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하늘의 뜻인 참은 완성된 물건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이제 길이 참이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우리말 참에서 펼쳐지는 진리사건에 눈을 돌린다. 우리말 참에 각인되어 있는 삶의 진리를 읽어내기 위해 참과 연관된 우리말 말놀이에 주목한다. 함석헌은 그 가운데서 ‘그득 들어차다’의 명사형인 ‘참’과, ‘잠시 쉬어가는’ ‘참’과, ‘참다’의 ‘참음’을 삶의 참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로 끄집어내어 설명한다.
 
‘참’은 무엇보다 ‘충만함, 그득 들어참’을 뜻한다. 어느 한 구석 이지러진 데가 없는, 조금이라도 빈 곳과 틈, 흠집이라곤 없는 온전함을 의미한다. 삶이 ‘참을 찾음’이라 했을 때 이 경우 참은 바로 온전함이다. 온전함은 무한이고 절대이며 영원이다. 유한한 상대 세계의 시간을 사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러한 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성서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장 48절).
 
함석헌은 ‘하나’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다’(生, 我)라고 말한다. “나는 나다.”하는 이가 하나다. 생명의 원리는 ‘자(自)’다. 자유, 자재, 자생, 자진, 자연이다. 저절로 그런 것이다. 참은 참이지, ‘왜 참’이란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름을 묻는 모세를 향하여 “나는 있어서 있는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있다’는 말은 할 수 없이 하는 말이다. 있다면 없음에 걸리고, 없다면 있음에 걸린다. 그런데 참은 있음과 없음 모두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참은 있음도 만들고 없음도 만드는 이다. 모든 생각이 나에서 나오고 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생각을 할 때는 ‘나’ 할 수밖에 없고, 모든 첫소리가 ‘아’요, 깊어질 수 있는 데까지 깊어진 소리가 ‘하’기 때문에 생각이 지극해 감탄할 때는 ‘아’ 하거나 ‘하’ 하는 것 같이, 뜻의 지극한 곳을 말할 때 그 이상 더 할 수가 없어서 ‘하나 혹은 한아’ 한 것이다. 하나는 형의 지극한 것과 뜻의 지극한 것이다. 합해 표시된 말이다. 참은 하나요, 하나님은 참이다.”
 
20C 문명은 신화 잃은 ‘참혹한 장애인’
생명중심 세계관 열어야 하늘나라 완성

 
이렇듯 함석헌은 참에서 있음이 나오지만 ‘있는’ 것이 참도 아니요 ‘있던’ 것이 참도 아니라고 말한다. ‘있을 것, 있어야 할 것’이 정말 참이다. 시(始)가 종(終)을 낳는 것이 아니라 종(終)이 시(始)를 낳는다. 신화는 있던 일이 아니요, 있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20세기 문명은 신화를 잃어버렸기에 참혹한 장애인이다. 신화는 이상이다. 이상이므로 처음부터 있었을 것이다. 알파 안에 오메가가 있고, 오메가 안에 알파가 있다. 그러나 이 문명이란 것은 알파도 오메가도 잃은 중간이다. 중간은 죽은 거요, 거짓이다. 이 사실에 붙는 문명은 죽은 문명이요, 거짓 문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참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가? 함석헌은 ‘참 든 마음’으로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는 이미 참이 와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마음, 참되지 못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마음은 참이다. 참이 벌써 우리 마음에 와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참이며 또한 그래서 참을 찾는다. 그리하여 참을 찾아 나섬이 곧 참이 된다.
 
함석헌은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참에 맞추어 참답게 살기 위해서는 ‘찬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참으로 ‘그득 찬 마음’을 찾기 위해, 다시 말해 ‘텅 빈 마음’을 이루기 위해 찬, 냉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참을 경험해서 그에 맞추어 내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가? 함석헌은 이에 대해 “참은 맞섬”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무엇에 딱 맞서는 것, 직면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맞서지 않고는 하나도 모른다. 직면하는 것이 ‘무엇(실재)’인지 직면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맞서(직면)면 들여다본다(응시한다).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은 눈이 아니요, 들여다보는 눈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이 참이다.
 
함석헌은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 추구해온 참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진리가 바로 우리말 ‘참’ 속에 표현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말 ‘참’의 근본적 의미는 ‘진실’ 곧, ‘진짜 속알갱이’를 뜻하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삶 속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얻은 알음(앓음, 앎)을 통해 자신의 속에 맺은 참열매를 가리킨다. 서양의 진리가 말(로고스)과 명제에 방향이 집중된 인식론적 진리라면, 함석헌이 풀이하고 있는 한국인의 진리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진 생명의 진리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생명과 평화를 사랑해 왔다. 우리 민족의 기억이 갈무리되어 있는 한글 말에서 우리는 생명중심의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의 뒤를 좇아 바로 이 길을 간 것이다.
 
이기상(한국외국어대 교수/철학)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